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25 전쟁/전쟁의 전개 (문단 편집) == 국군의 지연 작전과 미군 == [[낙동강]] 전선과 [[인천상륙작전]]에 비해서 '''주목도가 정말로 낮은 것'''이 바로 [[한국군]]의 지연 작전이다. 그러나 국군의 지연 작전이 없었더라면 한국은 적화통일이 되었을 것이다. 미국과 한국의 사이에는 [[태평양]]이라는 [[지구]]에서 가장 넓은 [[바다]]가 있다. [[중국]]도 [[김일성]]의 요청을 받고, 고심끝에 병력을 보내는 데 한두 달이 걸렸다. 그런데 미군은 심지어 다시 병력을 소집하고 재편성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시간을 벌어준 것이 국군이다. 앞서 설명되어있듯이 6사단과 8사단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단이 중화기를 버리고 [[한강]]을 도하했다. 사실상 와해된 것이나 다름 없는 병력을 소집하고 지휘 체계를 구축하고, 부족한 소화기와 [[대포]]를 가지고 북한군의 공세를 막아냈다. 당시 국군은 전면전 수준의 훈련은 받지 못했지만 '''3년간 국지전과 무장공비 토벌이라는 실전을 바탕으로 국지전술엔 숙련된 군대'''였다. 중장비를 잃어버리고 다수의 병력이 흩어졌지만 분산된 병력들은 삼삼오오 복귀하거나 게릴라화 하였고 국지전에서의 경험을 기반으로 북한군의 중~대대급 부대들에 국지적 소모전을 통한 출혈을 강요하여 남진 속도를 늦추었다. 의외겠지만 중~대대급 부대들에 대한 국지적 소모전은 사단급 이상의 부대들이 작전을 속행하는데 크게 방해할 수 있는데 흔히 지연전 혹은 파비우스 전술로 알려진 이 전술은 끊임없는 출혈을 통해 부대의 전투력을 누적 감소시키고 보급선을 교란하여 정상적인 작전 수행을 어렵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신속한 기동 작전을 펼치는 경우 후속부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기동전의 명수인 독일군의 경우 선두 기동부대와 후속 부대간의 간격을 적 패잔병 등 잔존 병력이 찌르는 것을 막기위해 적을 물리적으로 완전히 포위, 섬멸하는 것을 강조했다. 북한군은 미군의 개입전 신속히 한반도를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일종의 신속한 기동을 강조했는데 북한군의 기동전술은 기동전의 명수였던 독일군이나 제파식 전술의 끝판왕 소련군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미숙했다. 독일군의 기동전술처럼 국군을 물리적으로 포위, 섬멸한 것도 아니었고 소련군의 제파전술을 받아들여 공세종말점을 연장할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국군을 향해 몰아치지도 못했다. 소련군의 제파 전술을 제대로 받아들였다면 북한군은 한강도하가 실패한 직후 한강 방어선을 우회하여 중부전선의 북한군과 합동하여 6사단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국군의 배후를 쳐야했는데 북한군은 서울 점령 후 3일 동안 강북에서 시민들을 학살하기 바뻤다. 여기에 본디 한강 이남 국군 방어선의 측면을 포위하기로 했던 중부 전선 북한군은 6사단의 분전에 가로막혀 지리멸렬하게 패퇴하였다. 여기에 북한은 침략과 동시에 반동분자를 숙청한답시고 인민재판을 통해 조금이라도 자신들의 눈 밖에 난 대한민국 국민들을 학살했으니 북한 점령하 대한민국 국민들의 인심을 얻지도 못해 국군 유격대들이 시민들의 협조를 받아 북한군을 괴롭히는 것을 허용해버렸다. 김포사령부의 경우에는 영관급 지휘관들의 육탄 돌격을 통해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할 수 있었다. 만약 국군이 미군이 도착하는 9월까지 [[북한군]]을 막지 못하고 [[부산]]까지 함락되었다면... 수도 서울이 함락되는 데 3일이 걸렸음을 감안했을 때 '''대단한 분전'''이었다. 동시에 얼마나 [[채병덕]]이 무능했는지를 알 수 있다. 아무튼 전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판단한 [[맥아더]]는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스미스 특무부대'를 투입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